▣ 잡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서기오 2021. 9. 28.

살다 보면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인지, 또는 선한 것인지 의문에 잠길 때가 많다.

맹자는 사람은 본디 선하다고 했고, 순자는 악하다고 했다.
이는 동양철학적 관점이고, 기독교철학의 입장은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악하다라는 개념으로 얘기하고는 하지만, 사람을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외면적 형상이 아님은 설명이 불필요할 듯) 만들었기 때문에 순자의 성악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가끔 어떤 사람에게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말이나 행동을 목격하게 될 때는 우선은 당황스럽지만, 사람들은 누구라도 예외일 것 없이 보이는 것과 다른 또 다른 세계의 내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약물에 의해 하이드로 변신해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지킬의 모습은 소설로써 작가가 느낀 문제의식을 표현했다고 보이는데, 근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부쩍 많이 기억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어릴 때 책 읽기를 참 좋아했기 때문에 책처럼 생긴 것은 열 두 권짜리 세트인 삼국지 전편까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읽어젖히곤 했고, 그 즈음(초등학교 4~5학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처음 느낀 것은 공포였다.
하이드의 잔혹한 범죄현장들은 당시 읽은 책이 청소년용 도서로 어느 정도 순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포감에 전율을 느끼며 책을 읽어 나갔다.
책을 읽으며 공포를 느꼈다는 것은(쾌감이 수반되는 공포가 아닌 순수한 공포) 그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전혀 하이드 씨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책을 읽고 사회생활이란 이름으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고, 별의별 일을 다 겪여봤다.

누가 '내가 변한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변한게 한 거야'라는 멘트를 날리는 걸 영화에선가 본 것 같다.
세상이 나를 변하게 한 것이든, 아니면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것이든 나는 변했다는 것을 느낀다.
굳이 다른 사람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공존하는 내면세계를 가끔 확인할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또 거부하고 싶은 하이드 씨의 모습에 공포와 함께 경멸을 날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놀람은 하이드 씨를 발견할 때마다 새롭게 반복된다. 때로는 지킬 박사도 진정한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회에는 도덕률이라는게 있어서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하는 하이드 씨의 출현을 스스로 자제해 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회가 유지되어왔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도덕률이라는 것의 한 쪽이 급격히 무너지는 것을 본다.

이지메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일부 불량한 학생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치기에서 출발한 작은 만행 정도로 이해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도 몇몇 불량한 학생들이 공부만 하는 친구를 무시하고 따돌리기는 했으니까. 그렇다고 그에게 물리적인 폭행을 가하지는 않았다.
놀리고,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확인한 친구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수준은 영화에서나 보던 조폭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소설을 처음 읽을 때 하이드 씨의 모습이 연상되고 공포감이 느껴진다. 내가 피해를 당한 학생은 아니지만, 제3자의 입장으로 느끼는 공포도 적지 않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댓글전(戰)에서도 비슷한 것을 본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PC통신 시절에도 댓글이 있었고, 또 논쟁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누군가 어떤 글을 남기면, 그 글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고, 또 반론에 대한 반론으로 싸움(!)은 이어져 갔지만, 인신공격이나 욕설은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댓글은 상대방이 남긴 앞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론이 가능했고, 그 반론 글을 읽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논리적이고 또 어느 만큼의 사실과 지식을 바탕으로 반론을 했다.
그런데 지금의 댓글전은 거개가 그렇지 못하다.
상대방의 논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듯, 읽은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하나 집어내 그 부분을 욕을 섞어 공격한다.
그리고 그 악성 댓글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과연 이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인터넷 상이 아니라, 한자리에 모여서도 이와 같은 말들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원글의 의도는 그게 아닌데, 왜 이런 댓글을 다는 걸까? 독해력이 부족한 걸까? 그런 의문도 든다.

길을 걷다, 자동차가 위협적으로 운전하며 내 곁을 스쳐지나갈 때, 나는 반사적으로 험악한 상욕을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창피함과 함께 놀라기도 한다.
욕을 어디서 배워서 스스럼 없이 나오는 것일까,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반사적으로 잠시 하지만, 욕은 모르던 욕이 방언처럼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친구들과 그것도 멋이라고 욕을 섞어가며 거칠게 말하던 기억이 일부이지만 내 안에 남아 있던 것이고, 그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의 내 반응이다.
마치 그 운전자가 앞에 서 있으면 한 대 때리기라도 할 듯한 내 거친 태도에 나는 놀라기도 하며,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자문한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세상이 너무 험악해졌다.
자본주의의 폐해로 사람이 아닌 돈이 세상의 근본이 됐고, 그러다보니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반사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해져야 하지만, 그들처럼 잔인하지는 못하고, 거칠어지는 것이 보호가 될 것이라는 막연함으로 돌발적인 상황에서는 거친 모습을 거침없이 보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렇다면 성직자들이나(모든 성직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특별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요지부동하며 선함으로 대응하는데,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의외로 해답은 누구나 알고 또 간단하다.
끝없는 자기수양을 통해 이뤄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해하고 양보하고 본인이 손해보더라도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결국 오늘날 하이드 씨가 더 이상 약물이 없어 지킬 박사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도, 그래서 거리에서 인터넷에서 하이드 씨가 활보하는 상황도 사회적 문제로 책임을 회피하기에는 설득력에 한계가 있다.

좀 엉뚱할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세상으로 변한 이유를 나는 교육에서 찾고 싶다.
학교교육이 아니라(그렇다고 학교교육이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고) 가정교육의 문제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태세이다. 그것만 봐서는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언뜻 들지 않는다.
그리고 핵가족시대가 되며 자식을 하나 많아야 둘 만 낳아기르는 집이 일반적이 되면서 아이들에게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부모는 별로 없다.
한국 지하철에서 봤던 풍경 - 이것도 벌써 10년이 넘은 것이니 지금은 더 많이 변했을 거라 추측된다.
지하철에 자리가 하나 났다. 어느 아주머니가 서둘러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까지는 아줌마 시리즈 유머에도 나오는 흔히 본 풍경이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를 부른다 "OO야 여기 자리났어, 얼른 일루 와서 앉어'
그리고 그 꼬마는 당당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서 나이가 상당히 드신 할아버지께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셨다.

그 꼬마는 지금쯤 이십대 초반의 청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하철에서 자리가 생기면 그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옆에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계시더라도.

영화나 소설을 통해 미리 보는 미래는 대부분이 암울하다.
과학이 발전해 생활은 더 편리해 보이지만, 미래영화를 보고 나면 우울하다.

지킬 박사가 내면의 감추어진 또 다른 모습이고, 하이드 씨의 모습이 일반화되어 버린 그런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아직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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