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랩/시4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 스크랩/시 2024. 3. 18. 이런 시(詩) - 이상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여놓고보니 도모지어데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드니 어데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하기짝이없는 큰길가드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얐으니 필시(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드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悽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作文)을지였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든 그대여 내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골을 물끄러미 치여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그만찢어버리고싶드라 ▣ 스크랩/시 2023. 1. 21. 아버지 자라는 것이 암덩어린 줄도 모르고 몸속에서 피가 줄줄 새는 줄도 모르고 휘청 휘청거리는 건 나이 탓이라고 세상 탓이라고 안성에서 인천까지 저승에서 이승까지 시속 150을 넘나드는 앰뷸런스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아버지가 멍투성이 주사자국 당신의 몸보다 더 못미더운 칠순 아내에게 틀니도 빼앗겨버린 응급실에서 홀로 아내만 남겨질 세상에서 응급하게 전화를 한다 문단속잘하고 혈압약꼭챙겨먹고 잘땐전기장판3으로맞추고 -이한주, 시집 『비로소 웃다』에서 ▣ 스크랩/시 2021. 9. 1. 안녕 사막 안녕 사막 조미희 안녕, 사막 알 바 없는 너의 갈증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선택은 선택을 부르고 안녕, 사막 가끔 땅은 기침을 하며 나를 내뱉곤 하지 엎질러진 태양의 잔해를 앓고 있는 사막에 남겨진 이빨자국 우직 몸을 꺾어 거품을 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함부로 탕진해버린 햇살과 바람과 물과 사랑의 말씀들 결심한 듯 벌컥벌컥 내 푸르름을 탐하던 도시를 활보하고 돌아온 황사 모래안개 속 사막은 아직 풋내가 나 단물 다 빠져나가 쪼그라진 욕망의 마지막 고해라고? 천만에, 나는 지금 높이 솟은 구리 뱀이 된 거야 안녕, 사막 너는 뿌리내릴 수 없는 사막의 뼈 누군가 이 견고한 중심에 송신탑을 세우고 비밀번호로 잠긴 모래알들을 깨워 누각을 짓고 있어 점점 좁아지는 막다른 골목의 끝엔 언제나 솟아 날 그 무엇이.. ▣ 스크랩/시 2021. 8. 26.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