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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차가웠던 '그'와의 키스

서기오 2021. 9. 1.

[김현진의 '육체탐구생활']아버지의 차갑던 뺨, 그 차가웠던 입맞춤

내가 본 육신 중 가장 차가운 것은 내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입고 웃고 울고 화내고 나와 다투고 먹고 마시고 기도하며 이 땅에서 산 것은 채 오십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적게 살았다 할 수는 없지만 백세시대라고 할 때 부친을 좀 일찍 잃은 억울함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울고 화내고 다투는 것보다 웃고 먹고 마시고 기도하는 것을 한층 더할 것을, 언제나 후회해 보았자 부모는 가고 없다. 아버지가 이 땅에서 60년도 살지 못하고 떠난 지 벌써 3년이 되어간다. 형제 없이 하나 있는 외동딸이라 3일장 내내 장례의 전과정을 따라 다니면서 이것저것 사소한 것을 결정하거나 하다가 마침내 마지막 목욕을 한 아버지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냉장고 한 칸에 넣었다. 오래 앓지도 않은 죽음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롯데하고 기아가 12:12로 연장전까지 갔는데 그래도 승부가 안 났다’ 뭐 이런 시시한 것이었다.
          

▲ 김현진 칼럼니스트 (사진=참세상)

그를 그 냉장고에 집어넣기 전에 나는 차가운 그의 얼굴을 살살 만져보았다. 참 많이 사랑했고 미워했고, 너무나 사랑받고 싶었고 미움 받기 싫었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혈색이 가신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내가 태어나서 해 본 중 가장 차가운 키스였다. 그렇게 나와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 그는 화장터로 옮겨졌다. 체구가 크지 않았는데도 그의 육신은 참 오래도록 탔다. 그가 새하얀 가루가 되어가는 동안 양쪽 집안 사이에 긴장이 생겼다. 장모에게 몸과 마음을 오래 기대고 살았던 만큼 사랑하고 사랑받은 장모, 그러니까 자기 어머니 옆에 모시고 싶었던 내 어머니와 안동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는 영양이라는 시골에서 꼬장꼬장하게 살아가는 아버지 집안 일동과의 충돌이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9형제 중 두 번째로 어린 동생이 가장 먼저 떠난 것에 황망해 있었지만 그가 고향 선산에 묻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했다. 법도와 인륜 같은 단어들을 경상도 사투리로 한참 동안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가 고열로 태워지는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작은 등을 보았다. 아버지의 형제 자매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에게 베푼 것보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사위에게 베푼 것이 많은 것은 맞는 이야기였다. 잠깐 생각하다가 나는 경쾌하게 말했다.

“가서 종이컵들 가져오시죠. ”

친척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계속해서 명랑하게 지껄였다.

“우리가 매장을 한다면 팔 하나 잘라 대구에 묻고, 다리 하나는 영양에 묻고 할 수가 없지만은 어차피 화장이지 않습니까? 한 줌 가루가 된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모두가 나눠 갖기에는 충분히 많네요. 원하시는 분들은 다 밀폐용기를 가져오시면 공정하게 나눠 갖기로 하겠습니다. 제 아버지를 오래 간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팀 영양은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잠시 의논 좀 하겠다며 그들이 사라진 동안 나는 뼈가 되어 나타난 아버지를 만났다. 내가 입맞춘 입술도 타 버렸을 것이다. 화장터 일꾼이 뼈를 바수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젠장, 이걸 봐 버렸으니 이제 다시 뼈다귀해장국은 못 먹겠구나. 팀 영양이 돌아왔다. 장모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장모 옆에 묻히는 것이 맞다고 중지를 모았다 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종이컵 가져오시라고 해도 다들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때 일종의 취재를 위해서 녹즙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내 정체성이 녹즙 배달원인 것으로 착각해 버릴 지경이었다. 만기 병장처럼 뒷사람이 채워질 때까지만, 이라고 지사와 약속해 놓고 결국 22개월을 채우고 있었더니 내 자의식이 끈끈한 녹즙과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3일장 중 그 이틀이 22개월 중 유일하게 배달을 빼먹은 두 날이었다. 토요일 발인을 마치고 월요일 출근을 했더니 몇몇 손님들이 화를 냈다. 부친상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자 대부분의 손님은 이해했지만 한 손님은 계속해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하고 입을 비죽거렸다. 나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아버지가 두 번 돌아가실 일은 없으니까요. 그제서야 그녀는 불평을 멈췄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집에서 엄마를 놓아두기 걱정이 된다는 이유로 이모들은 엄마와 대구행 열차를 탔다. 아버지의 유골함도 함께였다. 그 집에 나는 남았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사랑한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그저 그렇게 사랑한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였다. 그저 그렇게 사랑한 강아지는 당뇨병을 앓고 있어 매일 인슐린 주사를 놓아 주어야 했다. 여러 모로 엄마와 함께 갈 수도, 그렇다고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로 여기 멀쩡하게 머물기도 힘든 상태였다. 엄마에게 유골을 조금 덜어 놓고 가기를 부탁했다. 팀 영양은 졌지만 아버지를 고향 산천에 모시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유골함이라고 별 것 필요 없다 싶어 핑크색의 예쁜 프림통을 샀다. 아버지를 넣어 놓으려고 프림통을 샀다. 아버지가 프림통에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전에 더 심한 곳에 있었다. 기차를 타고 떠난 엄마가 문자를 보냈다. “아빠 청국장 통에 있다. ” 엄마도 참, 아필이면 아버지를 왜 청국장 통에 담았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빈 청국장 통에 아빠가 조금 들어 있었다. 예쁜 병에 아버지를 옮겨 담고 빈 통을 헹구는데 한때 아버지였던 가루들이 물에 동동 떠올랐다. 이걸 하수구에 쏟아 버리자니 손목이 안 움직여서, 결국 나는 아버지였던 가루들이 섞인 물을 마셨다. 원샷이었다. 바스락, 입 안에서 아버지가 씹혔다. 아버지, 아버지. 그렇게 나에게 뼈와 살을 준 아버지는 또 내 뼈와 살이 되었다. 그 차가운 입맞춤, 차갑던 뺨. 벌써 아버지가 떠난 지 3년이 되어간다는 게 실감나자, 다시 입 안에서 아버지의 감촉이 느껴진다. 마지막 그 육신의 감촉이. 우리의 마지막 접촉이. 뽀드락, 뽀드락...

김현진 / 칼럼니스트

 

출처: 내 생애 가장 차가웠던 '그'와의 키스 - 미디어스 (mediaus.co.kr)

 

내 생애 가장 차가웠던 '그'와의 키스 - 미디어스

내가 본 육신 중 가장 차가운 것은 내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입고 웃고 울고 화내고 나와 다투고 먹고 마시고 기도하며 이 땅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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