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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 대하여

서기오 2025. 4. 27.

개신교 개요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되어 생겨난 기독교 교파를 통칭한다. 개혁을 통해 생겨난 교파이므로, 명칭도 고칠 개(改), 새롭게 할 신(新) 자를 써 ‘고치고 새롭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의 본래 명칭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다. ‘항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항거’를 의미하는 라틴어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에서 유래한 것이다.

1529년, 독일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계 종교개혁파들은 개혁을 탄압하려는 카를 5세(Karl V) 황제와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항거(Protestatio)’한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라 불렀다.

프로테스탄티즘에 영향을 준 15명의 종교개혁가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시동을 건 종교개혁은 독일 작센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츠빙글리, 장 칼뱅 등에 의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종교개혁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발했다.

인류 전쟁사에서 매우 잔혹하다 악명 높은 30년전쟁 역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대립으로 촉발되었다. 끝없는 종교 전쟁은 1648년, 프로테스탄트가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인정받으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그 결과 가톨릭의 종교 통일은 무너졌으며, 근대 유럽의 기독교는 로마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리시즘(Catholicism)과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으로 나뉘게 된다. 더불어 프로테스탄트는 각자의 신앙 사상과 성경 해석에 따라 분열하였다. 현재 개신교 교파는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등 매우 다양하다.

개신교의 탄생 배경

11세기, 동서 교회가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으로 분열된 이후 로마가톨릭이 가톨리시즘(천주교)과 프로탄티즘(개신교)으로 나뉜 결정적 계기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00년대 초, 율리오 2세는 교황 즉위 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지시했다. 예술품을 좋아하던 그는 미켈란젤로 등 이름 있는 예술가들을 불러 바티칸 성당 내부도 화려하게 꾸몄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교황청은 급전을 마련하고자 제한적으로 발행하던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했다.

이들은 성직 자리까지도 돈으로 팔았다. 성직자들은 무리하게 빚을 져 성직을 샀다. 특히 독일의 주교 자리를 얻고자 했는데, 독일 주교는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정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로마 황제 선거 때도 개입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은 성직 매매 대금을 받은 후 성직자들에게 면죄부를 팔 권한을 주었으며, 주교가 된 성직자들은 빚을 갚고자 면죄부를 파는 일이 이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

이는 율리오 2세의 후임인 레오 10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기금, 교황령으로 진행된 전쟁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해 독일 마인츠 지방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거래했다.

알브레히트는 성직 매매로 주교가 된 사람이었으며, 갚아야 할 큰 빚이 있었다. 주교 자리를 사려고 독일의 금융 가문 푸거에게 작은 나라 전체 예산과 맞먹는 거금을 빌렸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 수익의 절반을 교황청에 상납하는 조건으로 알브레히트에게 면죄부 판권을 주었다. 알브레히트는 면죄부를 팔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부 요한 테첼을 영입했다.

요한 테첼은 아주 유명한 면죄부 장사꾼이었다. 테첼은 “헌금함에 동전이 ‘쨍그랑’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조상의 영혼이 곧장 천국으로 들어간다”, “면죄부만 사면 어떤 죄든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판촉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자신, 사랑하는 가족, 친구를 구원하려 면죄부를 구입했다. 이 사업은 마인츠에서 독일 전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1517년, 면죄부 판매는 독일 작센주의 작은 마을까지 이르렀다. 비텐베르크의 대학 교수로 있던 루터는 교회가 권세를 남용하는 행태에 격노하여,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해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문에 게시했다. 루터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완전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로마제국의 최고 부자보다 수입이 많은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 정도는 가난한 신자들의 돈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교황청을 비판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당시 유럽은 인쇄술이 발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시기적절하게 루터의 반박문은 활자로 인쇄되어 단 2주 만에 독일 전역과 스위스로 빠르게 퍼졌고,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루터는 이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교회는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하는 교황청에 반박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목숨을 담보로 불려가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그의 책들은 모두 불살라졌다.

보름스 국회는 루터를 공식적인 이단으로 선포했으나, 그는 여전히 독일의 영웅이었다. 이미 많은 귀족과 제후가 루터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다. 당시 독일은 제후들이 각 지역을 분봉 받아 다스리는 봉건 사회였는데, 제후에게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 시민들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1526년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루터파 제후들은 자신의 영토에서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으며, 루터교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다. 이는 로마가톨릭은 물론 가톨릭교도였던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았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로마가톨릭과 카를 5세는 보름스 칙령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제1차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안을 인정하겠다던 사안도 철회해버렸다. 이에 루터를 지지하던 5명의 제후와 14개 도시 대표들이 법적 호소문 형식의 항의서(Protestatio)를 제출했다. 그들은 저항하는 자들이라 하여 프로테스탄트라 불렸으며, 프로테스탄트들의 저항 운동이 루터를 중심으로 거세게 확산되면서 프로테스탄티즘,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개신교의 분열과 다양한 개신교 교파

독일 비텐베르크시청 광장에 세워진 마르틴 루터 동상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 출신 칼뱅에 의해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됐다. 영국에서도 14세기 존 위클리프가 닦아놓은 종교개혁의 발판을 토대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초기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비성경적 논리와 부정부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위와 성경을 중심으로 변화하자는 정신이 강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과 신앙의 가치관은 신학자마다 달랐다. 한마음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한 이들은 결국 각자의 주장을 따라 분열하게 된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촉발됐을 무렵, 스위스도 개혁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위스 취리히에 사제로 있던 울리히 츠빙글리는 육식을 금하는 사순절 기간 동안 일부 신도가 소시지를 먹는 것을 용인했다. 다른 사제들이 츠빙글리를 처벌해야 한다며 반발하자, 츠빙글리는 “육식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은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고 주장했다. 소시지 사건을 계기로 츠빙글리는 로마가톨릭과 절연하게 된다.

1523년, 츠빙글리는 67개 신조를 내세워 로마가톨릭의 부패를 본격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진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독일 헤센주의 제후 필립은 루터와 츠빙글리가 동맹할 것을 제안했다. 둘은 필립의 주선으로 헤센주 마르부르크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그러나 뜻밖의 논쟁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바로 성만찬 논쟁이다.

로마가톨릭은 “성만찬을 할 때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하며, 예수님의 피를 실수로 흘리면 안 되기 때문에 일반 신도에게는 잔을 돌리지 않고 떡만 주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에 반박하며 성만찬 때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셔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관점은 각자 달랐다. 루터는 “성찬 시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떡과 포도주 안에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츠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 기념할 뿐이며 신비로운 사물이 될 수 없다”는 ‘상징설’을 주장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떡과 포도주에 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의견에 합의점을 찾지 못해 서로 극렬히 반발하며 갈라섰고, 이 사건은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신학적 분열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가 분열한 또 다른 논제 중 하나는 세례였다. 로마가톨릭은 “유아 때 세례를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아 세례’를 인정했고, 루터와 츠빙글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각에는 유아 세례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인데 어떻게 유아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고백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유아 때 받은 세례는 효력이 없으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시기 종교적 지도자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츠빙글리는 시의 모든 아이가 출생 후 8일 안에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1525년 이에 반발하며 유아들의 세례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재세례파 운동’이 그것이다.

평소 시의회 등 정치 세력의 지지 없이는 종교 개혁을 추진하지 않는 스승 츠빙글리에게 실망하였던 펠릭스 만츠(Felix Mantz, 스위스 형제단)는 유아 세례를 반대하며 재세례파를 형성했으며, 종교와 국가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얼마 못 가 취리히 시의회에 의해 체포되었고, 훗날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이 함께 재세례파를 탄압했다. 당시 그들에 의해 학살당한 재세례파 신도는 무려 1만 명에 이른다. 멸절 위기에 있던 재세례파는 네덜란드의 사제로 지내던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지도자로 나서면서 회생해 메노나이트교(Mennonite)가 만들어졌다.

재세례파를 탄압하던 츠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 전장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가 이루지 못한 개혁을 장 칼뱅이 이어받았다. 장 칼뱅은 스위스에서 활동했으나 사실 프랑스 사람이다. 칼뱅은 대학 시절, 니콜라스 콥이라는 대학 학장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의 연설문 작성을 도우면서 루터 등 종교개혁자의 말들을 인용했다가 프랑스 정부의 공분을 샀다.

순식간에 수배령이 내려진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했다. 그리고 개신교 사상이 부도덕하지 않음을 입증하고자 책을 써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이 책이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다.

당시 제네바에서 개신교 사상을 전하고 있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접하고, 칼뱅을 찾아가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이끌어줄 것을 강하게 설득했다. 이를 계기로 칼뱅은 제네바에서 자리를 잡고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칼뱅의 개혁 운동은 주변 국가에도 입소문이 났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많은 국가의 신학자들이 제네바로 넘어와 칼뱅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웠다. 장로교의 창시자 존 녹스(John Knox) 역시 칼뱅의 제자로 활동했으며,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장로교를 세웠다. 존 녹스의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채택되었고, 미국과 영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헨리 8세와 캐서린 왕후

영국의 종교개혁 운동은 존 위클리프가 장전했으나, 개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영국 왕 헨리 8세다. 당시 헨리 8세는 요절한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을 왕후로 맞았다. 그러나 이는 스페인과 영국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혼인이었고, 정작 자신은 캐서린의 시녀인 앤 볼린에게 빠져 있었다.

1529년,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카를 5세가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를 두고 로마가톨릭과 크게 대립하다가 1534년,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되어 국왕이 통치하는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영국의 국교회, 성공회가 탄생했다. 성공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톨릭의 전례를 답습하고 있었다.

이에 성공회 안에서 더 철저한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자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불렀다. 그러나 청교도도 얼마 못 가 분파되고 말았다. ‘성공회 안에 남아 하나씩 개혁해가자’는 비분리파와 ‘국교회는 진리 교회가 아니므로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분리파로 나뉘어졌다.

분리파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모여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회중 중심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파가 바로 침례교다. 침례교는 국교회의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들은 핍박을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침례교 신앙을 유지했다.

18세기에는 영국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성공회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개혁 운동을 벌였다. 그의 사상을 따르던 이들이 형성한 교단이 감리교다. 영국 감리교인 중 일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적인 미국 감리교회를 세웠다. 존 웨슬리는 일평생 성공회 사제를 직임하며 내부에서 개혁을 진행하였으나, 존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도 성공회에서 완전히 분파되었다.

19세기, 감리교 내부에서도 개혁을 외치는 성결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찰스 카우만과 캐나다 출신 어네스트 킬보른은 성결 운동의 영향으로 감리교에서 나와 일본 도쿄에 ‘동양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교단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성결교’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성결 운동은 훗날 오순절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오순절 운동으로 오순절교회가 생겨났다.

한편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교회 세태에 실망하여 1861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런던의 빈민가에서 자선 및 선교활동을 진행했다. 1865년 윌리엄 부스는 아내 캐서린 부스와 ‘구세군’ 교단을 설립하였다.

오늘날 대표적인 개신교 교파로는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회, 오순절교회(순복음교회), 구세군 등이 있으나 이 외에도 개신교 교파는 매우 다양하다. 20세기에도 이들은 수없이 분열했으며, 한국에만 해도 수백 개의 교파가 존재한다. 진리가 사라진 지 오래된 척박한 땅에서 무엇이 참 진리인지 알지 못해 각자의 주장을 따라 분열된 것이다.

개신교 5대 교파 – 장로교 편 [바로가기]

개신교 5대 교파 – 침례교 편 [바로가기]

개신교 5대 교파 – 감리교 편 [바로가기]

개신교 5대 교파 – 성결교 편 [바로가기]

개신교 5대 교파 – 순복음 편 [바로가기]

<참고 자료>

  •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권홍우, 서울경제, 2016. 4. 1.
  • “종교개혁의 뇌관, ‘면죄부’가 뭐길래…세계 최초의 다단계 종교상품”, 이현우, 아시아경제, 2017. 10. 31.
  • [시시콜콜 What] 연말이면 등장하는 빨간 냄비 ‘구세군’은 군대야?, 한국일보, 2019. 11. 28.
  • 『하루 만에 꿰뚫는 기독교 역사』, 티모시 존스, 규장
  • ‘프로테스탄트교회[Protestant Church]’, 두산백과
  • ‘장 칼뱅’, 네이버지식백과, 인물세계사, 함규진
  • ‘헨리 8세’, 네이버지식백과, 인물세계사, 표정훈
  • ‘영국의 종교개혁’, 두산백과
  • ‘독일의 종교개혁’, 두산백과
  • ‘스위스와 프랑스의 종교개혁’, 두산백과
  • ‘재세례파’, 종교학대사전
  • ‘메노 시몬스’, 두산백과
  • ‘메노나이트교회’, 두산백과
  • ‘감리교’, 교파 및 역사: 교회용어사전(가스펠서브, 생명의 말씀사)

출처: https://pasteve.com/christianity-comparison/protes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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